소소한 에세이

책추천 : 친애하고 친애하는 / 백수린

thereforeand 2022. 12. 9. 22:23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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정해진 일상이 있는 사람들,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명확히 아는 사람들을 반복해 만날 때마다 누구나 속해 있는 현재라는 국가의 불법 체류자가 된 것 같은 과장된 감정에 사로잡혔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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“봐라, 인아야. 세상엔 다른 것보다 더 쉽게 부서지는 것도 있어. 하지만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야. 그저, 녹두처럼 끈기가 없어서 잘 부서지는 걸 다룰 땐 이렇게, 이렇게 귀중한 것을 만지듯이 다독거리며 부쳐주기만 하면 돼.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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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 일을 기억할 때마다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진실이다. 정상적인 형태의 행복이라는 관념이 허상일 뿐인 것처럼. 물론 타인의 상처를 대하는 나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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겨울의 해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암전 직전의 무대처럼 복도가 잠시 환하게 장미색으로 물들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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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친애하고친애하는_백수린 중에서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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나는 혼자서도 곧잘 외할머니를 찾아가곤 했다. 늦게까지 티비를 보며 늘어져있는 손녀딸에게 유일하게 잔소리 한마디 없이 쌀튀밥을 그릇에 담아 출출할 때 먹으라고 놓아준 것도, 이른 아침에 야채주스 한 잔은 황금만큼 좋은 것이라며 늦잠을 자더라도 마시고 자라고 내 입에 컵을 들이밀어준 것도 할머니 뿐이었다. 책을 읽는 동안, 마치 “우리 강아지 좋아하는 것은 다 넣어서 맛있게 만들어줘야지” 하며 감자를 갈고 호박을 채썰어 밀가루 반죽을 휘휘 젓던 할머니 옆에 앉아 뜨겁고 바삭한 부침개 한 쪽을 기다리던 어린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. 할머니라는 존재는 으레 손주들에게 친절하다고 생각하지만, 그것과는 다르게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부분을 가지고 있었던 관계라는 것을 생각하면 사랑이란 반드시 이해를 배경으로 이뤄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.
어쩌면, 사람들은 각자 자신만의 감정의 온도와 산도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에 잘 맞는 성질을 가진 사람에게 많은 부분을 열어주고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. 지극히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친밀하게 애정하는 존재들이 형성되는 것을 보면. 그렇게 여태 살아보지 않은 삶을, 말로 채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감정들을 또 한 번 살피게 됐던 책.
언급해 놓은, 복도의 색을 표현한 문장에서 붉은 해가 남은 빛을 모두 쏟아내고 사라지는 느낌이 너무 생생해서 몇 번을 다시 읽었다. 그리고 아주 여리고 아주 따뜻한 그 다음 부분을 읽고 페이지에 손을 가만히 올렸다. 늙은 할머니의 손처럼 얇고 따뜻하고 부드러울 것 같아서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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#책스타그램📚
#백수린작가를좋아하게된것같다🙂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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